조계종 원로의원 원공당 정무대종사가 오늘(9월29일) 오전8시40분경 주석처인 안성 석남사에서 원적에 들었다. 법랍 55년, 세수 81세. 빈소는 출가본사인 용주사에 마련됐으며, 영결식은 오는 10월3일 오전10시 제2교구본사 용주사에서 원로회의장으로 엄수된다. 스님의 다비는 같은 날 안성 석남사에서 거행될 예정이다.
원공당 정무대종사는 1931년 전북 군산에서 출생해 1958년 전북대 수의학과를 졸업했다. 졸업하던 해 전강스님을 친견하고 군산 은적사에서 사미계를 받고 수행자의 길로 들어섰다. 1965년 범어사에서 동산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정무스님은 한결같이 일상에서의 수행을 강조했다. 수행에 대해 묻는 사람이 있으면 “기도, 참선, 주력, 경전공부 등 어떤 수행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흔들림 없이 꾸준히 실천해 자신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어야 수행이다. 그래서 습관이 중요한 것이다. 병이 생겼을 때 의사가 치료해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생활을 바로 잡아야 근본적인 치유가 된다”고 강조했다.
효 사상으로 청소년의 심성을 치유해야 한다고 늘 강조했던 스님은 1971년부터 1983년까지 제2교구본사 용주사 주지로 재임하면서 선원을 개원하고, 신도수련회와 대학생불교학생회 수련회를 시작했다. 포교자료집을 자체적으로 발간해 배포하는 등 신도교육에도 열의가 높았다. 지난해까지도 여분의 보시금이 생기면 대학생불교학생회에 쾌척하며 후학들에게 모범을 보였다.
하지만 스님의 생활은 늘 검소했다. 겨울에도 웬만한 추위에는 방에 불을 넣지 않고 지낼 정도였다. 또 법문이나 결혼식 주례 등 스님을 초청하는 사람이나 단체가 있으면, 자리를 따지지 않고 흔쾌히 수락했다. 버스와 지하철로 법문을 다니면서 삼보정재를 아꼈지만, 포교를 위해 필요한 곳이 있으면 아낌없이 쾌척했다. 대구 정법거사림회, 한국관음회, 세불회(稅佛會), 경찰대학불교학생회,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지도법사를 역임하였다
사찰 불사를 할 때도 스님은 직접 공사 현장을 돌아다니며, 나무 한 조각이라도 헛되게 버리지 않도록 감시하고, 불사를 지도했다.
정무스님은 또한 항상 수행자의 본분을 강조하고 실천했다. 1963년 김제 흥복사에서 5하안거를 지낸데 이어 대구 동화사 금당선원 등 전국의 선원을 찾아 참선수행을 했다. 스님은 특별한 일이 있는 날을 제외하고는 ‘3시 기상, 4시 예불, 5시 참선, 6시 공양, 7시 청소, 9시~11시 면담 및 공부, 11시 헌공… 오후8~9시 공부, 10시 취침’의 일과표를 방에 붙혀놓고 철저하게 정진을 했다. 평생 방 청소와 빨래를 남에게 미룬 적도 없이 검소한 승복을 입으며 생활을 했다.
문서포교에도 관심이 많았던 스님은 <용주사 본말사지>를 발행한데 이어 <정명의 길> <은혜를 갚은 사람> <평생공부> <마음공부> 등 다수의 저서 및 역서를 펴냈다. 또 용주사에 한글부모은중경탑을 세워 사찰을 찾는 사람들에게 효사상의 중요성을 전하고자 했다.
스님이 재가불자들에게 전하는 인생의 지침은 깊은 여운을 남긴다. “첫째 깨끗한 자연환경에서 살며, 둘째 본성을 해지는 직업은 버려라. 셋째 시간과 돈은 일의 가치 순위로 쓰며, 항상 공부하고 실천해야. 그리고 다섯째로 은혜를 알고 은혜를 갚는 사람이 되라.”
원로의원 정무스님은 입적을 예견한 듯, 지난 8월 오랫동안 법문 인연을 맺은 대구 법왕사를 찾아 ‘회향법문’을 하셨다. 그리고 스님은 “집에서도 부처님을 모시고 항상 기도하고 공부하라”고 강조했다.
“내가 이 세상에 인연 따라 왔다가 바르고 정직하게 열심히 살다 간다. 도솔천 내원궁에서 우리 거기서 만나자”는 열반송을 남기고, 스님은 이제 빛으로 가셨다.